얼마 전 멋진 친구 ‘민주’가
東京物語(도쿄 모노가다리/동경이야기) 사진을 올렸다.
갑자기 왠지 그곳이 그리웠다.
훌륭한 사람이 되어 온다고 했던 그곳에,
이제 훌륭한 사람이 된 나는 약속도, 목적도 없이 그냥 갔다.
20년 전의 조각난 기억을 찾아서.
풉~~
동경은 아직도 가을이다.
주절주절 이 비가 그치면 겨울이 또 오겠지.
1년가량 2번째 살았었던 이곳은 그땐 작은 시골 간이역 같았었는데 변했다.
캬~
아직 그대로 있었다.
사람 하나 겨우 들어가는 계단을 지나 2층의 6조(다다미 6장/3평)짜리 작은 방에서
싱가폴 친구, 나 그리고 또 다른 친구 셋이서 살았었다.
에어콘도 없는 이곳은 한여름엔 햇볕이 아주 따뜻하게 잘 드는 곳이었다.
물론 한겨울엔 아주 시원했다.
셋이 누우면 간신히 누울 공간 이었다.
묵시적으로 서로 알바시간을 달리하여 최대한 공간을 이용했었다.
난 주로 밤 8시부터 새벽 5시까지 일하였다.
밤10시부턴 시간당 200엔씩 더 줘서 짭짤하기도 했다.ㅋ
지금은 없어졌지만 옆집은 유명한 메밀국수 집, 앞집은 그 집 방앗간이었다.
피곤하고 지쳐 돌아온 새벽에 선잠이 들면, 그날 팔 메밀 빻는 소음에 돌아버렸다.
그 소리도 그립다.
역 앞 상가의 회전스시집도 그대로 있었다.
길 건너 회전스시집보다 10엔이 더 비싼 만큼 회가 두툼했었다.
그땐 비싸서 길 건너집을 주로 이용했었다.
길 건너집은 다른 상점으로 변해있다.
들어가서 송氏와 신氏가 그랬듯이 양껏 먹고, 또 먹었다.
보란듯이…
꺼억~~
일본서 처음 살았던 도시(?)의 역 앞 광장이다.
이곳에서 크리스마스 때 길거리 공연을 보고 ‘쨩켐보’를 해서 상품으로 셔츠를 탔었던 곳이다.
비싸지 않은 셔츠였지만 한동안 가난한 고학생의 유니폼이었다.
이동네서 한동안 신문배달을 했었다.
그때 난 언제나 저런 고급맨션에서 살아보려나 하는 꿈을 꾸었다.
“그것이 어째 없을꼬.” 모보단 저고리를 말하는게 아니다.
일본엘 처음 가서 살던 낡은 아파트는 암만 찾아봐도 보이질 않는다.
분명히 내려가는 언덕 중턱이었는데, 그쯤에는 올라가는 언덕밖에 없다.
너무 오랜 시간이 흘렀나 보다.
한국선 바나나가 아직도 무쟈게 비쌀 때 였다.
껍질이 검게 변한 바나나는 반값이었다.
자주 그 바나나를 사서 원 없이 먹어봤다.
동생 넘이 친구들과 놀러 왔었다.
검은 바나나만 사먹던 난 깨끗하고 이쁜 바나나를 집어들었다.
할마시가 검은 바나나도 남아 있다고 한다.
난 승질을 냈다. “내 동생 멕일꺼란 말여라.”
저녁에 동생 넘도 바나나를 사들고 왔다.
나 먹으라고 깨끗하고 이쁜 바나나를…
그 할마시가 아직도 과일을 팔고 있었다.
그곳에서.
한국 돌아갈 땐 동생과 친구넘들이 아끼고 안 썻던 돈을 모두 모아 몰래 방에 놓고 갔다.
그땐 멋져 보였던 건물였는데…
이 길로 쭉 가면 신문보급소가 있었다.
근데 없다.
수 시간을 헤매고 찾은 그곳은 반대편 쪽 길이었다.
하~~~
ㅠㅜ
배달하던 곳의 유일한 큰 아파트다.
10여 부를 한꺼번에 돌리고 나면 부수가 푹 줄던,
아파트 복도에서 동이 터오르던 반대편 한국 쪽 하늘을 보며,
그리움에 눈물 지며 담배 한가치 꼬나 물며 한숨을 돌리던 곳이다.
앞의 붉은 타일 건물자리가 예전엔 아파트 쓰레기집하장 이었다.
가구, TV, 그리고 여러 가지 쓸만한 물건들을 자주 줏어 쓰던 곳이다.
가난한 나라의 가난한 신문배달원인 날 친자식처럼 대해주던 T 아줌마가 있었다.
후에 나의 보증인도 돼 주었던…
잊고 있었다.
아직 살아 계실까?
설마.
20년 도 더 전인데.
기억을 더듬어 비슷한 집들의 문패를 하나하나 찾아보았다.
있었다.
날 기억해줄까?
자식들이 살고 있지 않으면 동명이인 이겠지?
초인종을 눌러 보았다.
하~~~
아저씨다.
많은 세월이 흘렀음에도 한눈에 날 알아봐준다.
아주머니는 저녁에나 들어오고, 아저씨는 오후에 아직도 일을 하고 계신단다.
저녁에 다시 찾아온다하고 나왔다.
한국서 정성스런 선물을 사갖고 오는게 맞았으나 생각도 못했기에 급히 백화점에 들렀다.
신쥬쿠의 젤로 좋은백화점의 1층에서 젤로 좋은 선물로 해드리고 싶었다.
조그만 지갑이 눈에 들어온다.
0 이 하나 더 붙어있다.
그래도 그걸로 하고 싶었다.
카드로 계산하며 다시 보니 0 이 2개 더 붙은 물건였다.
에궁~ 아파트 1년 관리비다.
할 수없이 아저씨에겐 1/10가격인 아파트 한달 관리비가격의 넥타이로 했다.
두분 모두 여전하셨다.
아직도 건강하게..
아주 가끔은 친구들과 그리고 동료와 한잔하던 거리다.
유명한 선샤인빌딩이 있다.
‘御茶ノ水'(오차노 미즈) 거리.
스키샵, 악기점들이 있는 곳이다.
동네 이름이 ‘찻물’ 멋지지 않은가.
옆에 흐르는 개울은 지금은 시커멓다.
같이 알바하던 곳에’御茶ノ水 여자대학교 학생 준꼬(順子/순자)라고 있었다.
헤어질땐 항상 수십번도 더 인사하며 헤어지던, 이름이 촌스럽다고 놀리던,
동그란 얼굴의 항상 웃는얼굴의 아이가 생각나는 거리다.
역에서 사먹던 우동이름이 ‘月見우동’도 있었다.
아끼느라 아무것도 없는 ‘가께우동’만 먹었던 난 그게 무얼까 항상 궁금했었다.
80엔이 더 비쌋다.
큰맘 먹고 시켜먹은 우동은 계란 노른자를 동동 띄운 우동.
ㅋ~~
‘센츄리빌딩’
과천의 K본사 설계할 때 참고했던 빌딩이다.
교정의 괴기스럽게 생긴 나무는 아직도 있다.
수없이 걷던 곳이었으나 그땐 알바시간에 쫒기고, 피곤했던 몸 때문에
이렇게 운치 있고 멋진 길인 줄 몰랐다.
이곳에서 한다리 들고 자주 영역표시를 했었다.
부르르~~
내 발자국이 어디 남아 있을터인데…
그때도 있었을텐데 오늘 첨 봤다.
‘국립서양미술관을 세계유산으로.’
별~~
내가 이곳 도서관, 미술관, 그리고 박물관에서 영혼을 살찌우며, 인류의 평화를 위해 고뇌할 때,
시흥 이氏가 있었다면 아마 이곳서 헤맷을 것이다.
오른쪽의 건물 안에 어른들을 위한 장난감가게들이 있다.
물론 ‘노모’도 판다.
남대문시장같은 곳이다.
그땐 牛足이 많이쌋었다.
근처 전자상가에서 노숙자 필의 손톱에 때가 꼬질꼬질하고 남루한 노인네가 배낭을 옆에 놓고,
전자 피아노로 클래식곡을 연주하고 있다.
너무나도 멋지고, 혼을 다한 연주라 한동안 넋을 잃고 바라보았다.
무슨 사연이 있을까?
예전에 이랬던 빌딩을,
‘한일월드컵’ 무렵 내가 일케하라고 했었다.
근데 가보니 일케 변해있더라.
난 보지도 못했는데.
ㅠㅜ
바로 그 옆이더라.ㅋ
여전히 번화하고 화려한 곳이다.
原宿(하라쥬쿠)거리다.
오른쪽 붉은 건물이 세계적 디자이너였고, 나비 문양으로 유명했던 ‘하나에모리’ 샵이었던 곳이다.
일본선 한국의 ‘앙 선생님’과 같은 존재였다.
그 건물 뒤 유명한 이탈리안 레스토랑에서 오랫동안 알바를 했었다.
그곳도 없어졌다.
한국선 아직까지 그곳처럼 맛난 스파케티를 먹어 본 적이 없다.
거리특성상 그곳엔 모델, 탈랜트, 그리고 연예인들이 자주 왔었다.
눈이 부시게 아름답던 그들에게 음식 맛있었다고 팁도 많이, 자주 받았었다.
쿄쿄쿄…
그런저런 불법노동자와 별반 다를 것이 없고, 말도 어눌하고, 조센진인 날
무쟈게 갉아댄 일본 넘이 있었다.
쌈 하려고 보니 난 존댓말밖에 몰랐다.
“당신이 날 이지메한다면 난 싫어요” 일케 말하며 싸울 순 없잖은가.
그래서 열심히 배우고 익혔다.
욕을…
써먹었다.
10 Bird야! ![]()
한번만 더 그러면 쥑여 삔다.
진짜루~~
(야꾸쟈 억양으로 멋들어지게 …)
그 후론 그눔을 볼 수 없었다.
알고보니 내가 알바하는 시간을 요리조리 피하며 하고 있었다.
후에 나름 괜찮은 학교에 진학을 하고 샵에서 우연히 만났다.
그눔들은 지보다 계급(?)이 위라 생각하면 바로 깨갱~이다.
공손해지고 깍뜻하게 변한 그눔이 불쌍해졌다.
창가의 멋진 디스프레이가 눈에 들어온다.
3층 창가에 하얀운동화를 쭈~욱 걸어놨다.
여기도 있구나.
멋쥐쥐?
돌아오는 날 동경의 하늘은 맑게 개어 있었다.